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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네피림과 촛불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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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811회 작성일 20-05-27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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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피림과 촛불”

서울의 밤하늘이 십자가의 불빛 대신에 촛불로 연일 붉게 물들고 있다. 한국 정부에서는 불순한 배후의 세력이 있다고 열을 올리고 있지만 참여한 인파나 구성원을 볼 때에 사실과 다른 것 같다. 대중들의 촛불 시위가 단순 시위를 넘어서 촛불 축제의 성격을 띤 이벤트로까지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오래전 미국에 이민 온 올드 타이머들은 대부분 촛불시위 자체에 부정적이다. 나도 객관적으로 부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한 달 전 한국 방문 중 만났던 친지들이나 목회자들의 반응은 대단히 심각했다.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불안감은 몇몇 단체나 어른들뿐 아니라 어린 학생들까지 나서서 부모에게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안 되는 이유를 문자 메시지로 보내며 설득하고 있었다.
나는 쇠고기 문제로 시작된 촛불집회가 빠른 속도로 무섭게 확대되는 것을 보며 민중들이 진정으로 열망하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민중들이 원하는 것은 ‘안전한 쇠고기’가 아닌 ‘영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현 대통령이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당선되었던 이유도, 크나큰 실망감을 안겨주는 이유도 똑같이 ‘영웅’의 문제다. 그 분이 장로라는 신앙심 때문도 아니었고 기업인으로서의 윤리나 도덕성은 더욱 아니었다. ‘현대’라는 대 기업의 CEO로 신화를 만들어낸 사람이었고 그것을 기대했었다가 정작 ‘영웅본색(?)’이 나타나니 그 실망감에 온 나라가 열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근래에 창세기의 노아의 홍수의 사건을 강해하면서 같은 모습을 보게 되었다. 창4장의 죄로 얼룩진 가인의 후손들은 세상 적으로 무척 화려했다. 그러나 그들만으로 영웅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창5장의 신앙의 후예인 셋의 자손들은 비록 “하나님과 동행”을 할 만큼 영적으로 아름다웠어도 그들도 영웅은 아니었다. 창6을 보니 드디어 영웅이 나타났는데 이름마저도 영웅본색인 “네피림-Giant”이었다. 그리고 그 “네피림”을 추앙하는 수많은 “용사”들이 나타났다. 그러한 “네피림”의 시작은 창5장의 사람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창 4장의 화려한 “사람의 딸들”과의 결혼에서 비롯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출현에 열광했고, 그들은 “고대에 유명한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되었다.
근세에 있어서 한국의 기독교가 추구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네피림 쫓기”이다. 성도들은 네피림처럼 크고 유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며 동시에 세상에서도 화려한 CEO나 용사가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성전도 그 어떤 세상의 건물에도 압도하는 위엄과 거대한 네피림 교회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다윗을 원했는데 삼손이 탄생하고 말았다. 삼손이란 사람이 용사로 여우들의 꼬리에 횃불을 달아서 종횡무진하게 했던 모습이 오늘날 한국을 붉게 물들고 있는 촛불의 향연처럼 보여지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삼손의 영웅적 힘이 “들릴라”의 무릎에서 무력해진 것은 ‘네피림 쫓기’의 당연적인 열매가 아닐까? 그 결과를 성경은 표현하기를, “하나님이 보시니 세상은 썩었고 무법천지가 되어 있었다”. (새번역 창6:11). 그 다음은 노아의 홍수였다.
그러기에 성도는 창5장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성도의 삶의 온전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 ‘네피림’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창6장은 노아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But 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the Lord"(Gen6:8). 우리도 노아처럼 마지막 세대에 하나님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는 기쁨으로 살아야겠다.

새생명장로교회 정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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