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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운남성의 묘족 찬가”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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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490회 작성일 20-05-27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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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운남성은 말 그대로 구름으로 둘러싸인 남쪽 산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운남성의 곤명은 북경에서 비행기로 4시간이나 가는 베트남국경에 인접한 도시였다. 해발 1,700미터의 고산지에 위치해 있었고 고온다습하고, 높고 수려한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도시였다.
곤명에 도착한 다음 날은 주일이었다. 주일날 예배는 샌디에고에서 동행한 몇 분 목사님들과 함께 묘족교회에서 드리게 되었다. 아침8시에 출발한 우리일행은 용달차로 산을 넘고 넘어서 오르다가 진흙더미에 빠지면 차가 요동을 치며 빠져 나오기를 거듭하며 낮12시가 되어서야 어느 산의 정상에 도달했다. 정상에 올라와보니 구름이 산들마다 걸려있는 모습을 보면서 운남성이란 이름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묘족마을은 해발3,300미터의 산 정상에 있었다. 토굴같은 형상을 한 토담집들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이었다. 그들의 키는 매우 작았으며 특이한 것은 여자들의 차림새였다. 아낙네가 익숙한 솜씨로 달구지를 몰고 가고 있었고 머리는 또아리를 얹어놓은 것처럼 동그랗게 감아올렸고 옷은 구약의 제사장이 입는 에봇과 비슷한 겉옷을 치마위에 덧입고 있었다.
묘족교회의 입구에 들어서니 이게 웬일인가 수십 명의 찬양대원들이 찬양을 하며 환영을 해주었다. 그들을 따라 예배당에 들어가니 그 작은 마을에 교인이 300여명이나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남자 성도들이 따로 구분하여 앉아 있었다. 성가대가 강단 앞으로 나가서 찬양을 시작했다. 선교사님의 말로는 그들의 학력은 중졸도 못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찬양의 하모니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묘족교회의 장로님이 예배를 인도하는데 선교사님에게 우리더러 나가달라고 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예배도중에 우리가 쫓겨나야(?) 한단 말인가-얼떨결에 나왔더니 사연인즉 묘족들은 하루에 두 번 11시와 오후5시에 식사를 하는데 자기들은 이미 식사를 했으니 우리보고 식사를 하고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졸지에 거룩한 예배를 중단하고 식사를 하는 불경스러운 먹사(?)가 되고 말았다. 토담 친교실에 들어갔다. 화로에는 불이 지펴져 있었고 권사님들로 보이는 분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음식을 만들고 있는데 내 눈은 자꾸 옆에 놓인 식기를 씻었던 구정물에 눈이 간다. 음식을 정성껏 준비한 모양인데 적나라하게 드러난 닭발이 너무 싱싱(?)해 보였고 낯선 향료를 섞은 요리는 중국음식에 익숙하다고 믿었던 나에게도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맛과는 상관이 없이 정신없이 먹었다. 왜냐면 예배 중에 나와서 음식을 먹고 있으니 무슨 정신이 있었겠는가?
다시 예배에 들어갔다. 간증은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찬양대가 또 앞으로 나왔다. 지휘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옷이 밭에서 일하다 온 듯 초라했지만 성령충만하게 보였다. 악기는 풍금과 아코디온이 전부였다. 성가대원 중 하나가 큰 소리로 외치는데 “왕중왕”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다 다를까 전원이 아름다운 하모니로 헨델의 메시야의 “할렐루야”를 찬양하기를 시작했다. 할렐루야 찬양을 들으면서 어느 대교회의 찬양제에 앉아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였다. {할렐루야-할~렐~루~야-王中王~} 하루에 두 끼 밖에 먹지 못하는 가난한 민족, 악보도 없이 숫자와 글씨로만 이루어진 책(?)을 들고 묘족 찬양대는 할렐루야를 부르고 있었다. 150년전 허드슨 테일러가 심었던 복음의 씨앗은 하도 높고 험악한 산중에 살아서 문화혁명 때 기독교 핍박의 대상도 되지못했던 버려진 백성들을 통해 싹이 트고 열매 맺고 있었다.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1: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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