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예배 (2007년 6월) > 목회칼럼

본문 바로가기

목회칼럼

가정 예배 (2007년 6월)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718회 작성일 20-05-27 14:26

본문

십대의 자녀들을 둔 가정이면 누구나 경험하는 사춘기의 혼란을 나는 요즈음 겪고 있다. 우리 집은 남자 아이만 둘이 있다. 작년에는 내가 퇴근하고 집에만 들어오면 자기와 키를 재느라고 부잡을 떨던 큰 아이 혼자 사춘기의 징후를 나타낼 때만 해도 그런대로 애교로 보아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올해에 들어와서는 동생까지 동서로 뛰기를 시작하니 둘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나도 사춘기에 지독한 방황을 했던 터라 내심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두 아이의 얼굴에서 솟아나는 여드름을 핸들하기가 어려운 것만큼 힘이 든다. 9학년인 큰 아이에게 나타난 사춘기의 현상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인생은 즐겁다는 것이다. 타고난 EQ의 탓도 있겠지만 그는 항상 happy한 소년이다. 친구들이 그렇게도 좋은가보다. 한번은 셀룰러 폰을 두 시간 빌려주었더니 두 시간 동안 무려 28번의 통화를 시도한 경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즐거움이 공부를 하는데도 따라야 하는데 시험이 다가오면 시험을 대비하는 기쁨보다는 시험 후를 준비하느라고 바쁘다. 성적도 성적이 좋은 과목의 결과만 생각하고 기뻐하지 나쁜 것은 아예 다음 기회로 넘겨 버린다. 그러니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가. 한번은 수요일 저녁에 수요예배를 마치고 같이 집에 오는데 ‘아빠 아빠는 왜 수요일 날만 되면 화가 나있어’ 그래서 내 자신을 보니 그렇다, 수요예배에 누가 나왔냐 안 나왔냐를 생각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굳어 있는 내 모습을 행복한 아들이 어찌 모를 리가 있으랴.
반면에 7학년인 둘째는 전혀 다르다. 십대의 사춘기의 비관론적인 증상인 아스퍼거 신드롬 정도는 아니지만 무슨 생각과 고민이 그렇게도 많은지 모르겠다. 긴 머리가 잘난 앞이마를 덮었는데 그곳에 숨어있는 수많은 여드름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사색을 하며 헤르만 헤세의 시인 ‘낭만적인 노래’를 좋아할 것 같은 아이다. 그런데 문제는 밤을 새워 실컷 한 숙제를 제출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심지어 시험을 보다가도 daydream(공상)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지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둘째가 나에게 왔다. 고민이 있다는 것이다. 고민 때문에 어제 잠을 하나도 못 잤다는 것이었다. 왜 그랬냐고 했더니 학교에 좋아하는 여학생이 생겨서 생각하느라고 잠을 못 잤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팔자에도 없는 연애선생이 되고 말았다. 막힐 때마다 몇 가지 코치를 해주었더니 해결이 잘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사춘기 때에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 문제로 고민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속에서 하나님도 아버지이셨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이신 독자 예수님을 어떻게 키우셨을까? 하는 반문을 하게 되었다. 예수님도 저절로 성장하고 크신 것이 아니라 분명한 하나님 아버지 스타일의 방법이 있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니 눅2장 30절에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나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내가 무슨 연애선생도 아니고 아들을 뒤꽁무니를 따라 다닌다고 해서 아이들이 복되게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키우신 방법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바로 이것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성경에 보면 제사장들이라고 해서 자녀들이 저절로 복된 자녀가 된 것이 아니었다. 엘리는 얼마나 비참한 아픔을 자식을 통해서 겪었는가, 그것을 보고 자란 사무엘도 예외가 아니었다. 야곱도 사랑하는 자식에게 채색 옷을 입혔다고 해서 자녀교육을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자녀들의 문제가 어디 내 집만의 문제이겠는가, 그래서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야곱처럼 그날 저녁에 가정예배를 선포했다. 그동안 드렸던 약식 가정예배가 아닌 정식 가정예배였다. 왜냐면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means)인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양이 있기 때문이다. 찬송가 3장을 한글 영어로 부르고 성경도 한글 영어로 설교도 한글 영어로 기도는 각자의 언어로 주기도문은 한글로 하는 예배를 선포했다. 지난 월요일에는 방법이 늘어서 찬송가의 한글 가사로 뜻을 알려주고 함께 목소리 높여서 불렀더니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 이제야 살 것 같다.

새생명장로교회  정 철 목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