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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목사 후보생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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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566회 작성일 20-05-27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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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풍년이 집안에서 나는 태어났다. 4남 1녀 중 장남이었던 나는 억샌 동생들 사이에서 성장의 투쟁을 겪으며 자라났다.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자라난 여동생도 남자들처럼 덕에 지금도 남편에게 큰소리치며 살고 있다. 남자 풍년은 우리대로 끝난게 아니었다. 장가간 동생들의 가정에서도 똑같은 일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그래서 동생들보다 늦게 장가를 간 나는 기도가 딸을 가져야겠다는 것이 소원기도였다. 어머니에게 말을 했더니 '장손인데 무슨 소리냐'며 핀찬을 들었는데 역시 아들에 관한한 기도발은 목사인 나보다 어머니가 훨씬 더 셌다. 우리는 이름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라'는 뜻으로 "하영"이라 지었다. 그리고 둘째를 가졌는데 어머니가 아들 기도를 시작할까봐 말도 못하고 이름을 아예 "예영"이라는 여자이름으로 지었다. 둘째는 임신할때부터 Feel이 달랐다. 교인들도 그리고 의사도 여자같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는 아기 옷도 여자 것으로만 준비하고 기다렸다.
드디어 둘째가 태어났다. 지독히도 울며 태어났다. 간호원이 나오면서 "It's a Boy!"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 두사람은 아이를 낳자마자 고민에 빠졌다. 왜냐면 한번도 남자이름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이름을 '주영'이라고 할려고 하는데 한국에 정주영씨가 딱 버티고 있지를 않은가, 시간이 촉박하다보니 "예수님"의 가운데 글자인 "수"를 따서 그만 "수영"이라고 짓고 말았다. 그 다음부터는 우리 집 뿐만 아니라 멤피스에 개척교회할때도 지금 섬기는 교회에도 아들이 풍년인 교회가 되었다.
그런 "수영"이가 어느덧 커서 올해에 중학생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아들 대신에 딸 노릇을 너무나 귀엽게 해주어서 너무나 고마웠다. 중학교 첫 학기를 시작하는 지난 9월에 제법 심각한 모습으로 나에게 말했다. '아빠, 우리 L.A Griffith Park 한번 가자'.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Griffith Park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다. 멤피스목회를 마치고 잠시 10개월동안 광야생활을 할때에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Griffith Park의 산 정상에 가서 아브라함처럼 동서남북을 바라보면서 다음 목회지를 달라고 기도했던 곳이다. 그 당시 아이들이 얼마나 그곳을 가지 싫어했는지 지금도 Griffith Park하면 그들에게 Worse Memory(나쁜 기억)중에 하나다. 그러면서도 그곳을 가고자했던 이유는 자기들이 아빠랑 그곳에서 기도해서 지금의 교회로 오게 되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 노동절이 다가와서 그날을 D-day로 잡았다. 그런데 문제는 수영이는 새벽 체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학교에 가는 것도 깨우다가 두사람이 지쳐야 일어나는데 어떻게 동뜨기전에 한시간 이상 걸리는 그곳을 제 시간에 갈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도 자기는 꼭 가야겠다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가야되는 이유를 중학교에 들어가서 All "A"를 맞게 해달라고 기도할려고 하는구나 생각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날이 되어 깨웠다. 나는 잘 모르지만 골프치러 가는 사람보다도 더 빨리 일어났다.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대도 둘 다 그렇게 enjoy할 수가 없었다. 정상에서 손을 잡고 기도하는데 나는 당연히 수영이의 기도는 학교 공부를 잘하게 해달라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기도가 달랐다. '하나님, 다시 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 멤버들도 이곳에 와서 기도하게 해주세요. 아멘'이었다.
그리고 학교를 열심히 다니기를 시작했다. 두어 주일이 지난후에 둘째에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다가왔다. '아빠, 나 결심했어' '나, 아빠처럼 목사가 되기로 했어. 이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거야'하고 말하는 아들의 목소리는 제법 떨리고 있었다. 난, 너무나 감격했다. 아이들에게 무엇하나 제대로 해주지 못했고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강아지마저도 시민아파트로 옮겨오는 바람에 친구집에 갔다주고 한달에 한번 보는 것을 손꼽아 기다리게 만든 아빠인데 그래도 아들에게 '목사'라는 직업이 귀하게 보였다는데 너무나 감사했다. 그말을 들은후에야 Griffith Park에서 기도한 기도가 자신보다는 교인들을 위해서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체질적으로 아침에 일찍 못 일어나는 것이다. 학교에 한번 갈려면 새벽기도는 고사하고 깨우는 전쟁을 치루어야 한다. 한번은 자기 엄마에게 "엄마, 나 새벽기도 안하는 목사하면 안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아내는 벌써 출근을 했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학교갈시간이 다되었는데 아직도 침대서 자고 있지않은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이불을 젖히며 '야 목사된다는 놈이 새벽기도는 못 갈망정 학교는 제 시간에 가야지'했더니 '아빠, 오늘은 더 자도 돼 late school day야'. 그래서 나는 자는 아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조용히 나왔다.

새생명교회 정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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